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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3월 09일
참 무의미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꼭 해보고 싶은 몇 가지 일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직장에 무단으로 결근하는 것이었고(이건 직장인일 때 한번 해봤다. 그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어 저질렀는데 그러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다), 또 하나는 전철을 타고 천안역에 가서 아라리오 갤러리를 구경한 다음 원조 호두과자를 사가지고 올라오는 일이었다. 사실은 며칠 전에 두 번째 일을 해보았다. 몇 가지 사정으로 아침 일찍 길을 나서야 했는데 어딜 가느냐는 엄마의 말에 모임에 간다고 대충 둘러대었다. 생각해 보면 거짓말을 할 이유라곤 도통 없었는데 왠지 모르게 나의 천안행을 가족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싶었다. 가족들 몫의 호두과자를 사오기 싫어서는 절대 아니었다. 그저 호젓하게 천안행 전철을 타고 온다 리쿠의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읽다 보니 어느덧 천안에 도착했던 것이다. 명동틈새라면이라는 역 앞 분식집에 들어가 이름에 걸맞게 애매모호한 맛의 우동을 한 그릇 먹고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헌책방을 지나칠 수 없어 책 구경을 하다 로저 젤라즈니의 책을 한 권 사서 밖으로 나왔다. 모처럼 포근하던 봄날이기에 햇살은 적당히 따스하고 천안 거리도 적당히 낯설었다. 아라리오 갤러리에 도착해 'our magic hour'라는 이름의 전시를 봤다. 이층 전시실에 있던 직원은 외로운 관람객을 위해 천장에 걸려 있던 전시물인 전기톱의 전원을 켜 주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Hans Op de Beeck(38세의 벨기에 작가라고 한다)의 Table(1)이었는데 거인들의 만찬의 자리를 (그야말로) 홀로, 몰래 엿보는 기분이 들어 한동안 커다랗고 하얀 식탁 주위에 머물러 있었다. 전시를 보고 길 건너로 호두과자를 사러 갔다. 학화 호두과자 건물은 그야말로 호두과자만을 위한 삼층짜리 건물이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니 호두과자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제일 작은 상자를 하나 사서 밖으로 나왔다. 떠날 때는 가벼운 가방으로 출발했으나 헌책과 호두과자가 자리를 차지하니 어김없이 불룩한 가방이 되어 있었다. 무거운 가방은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업보라는 사실이 갈수록 또렷해진다. 어디에나 다 있는 도넛가게에 들러 커피와 도넛을 시켜놓고 온다 리쿠의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읽었다. 모처럼의 천안행에 동행한 책으로서 더할나위없이 훌륭한 본분을 다해주고 있어 참으로 고마웠다. 용산행 직통전철을 타려던 계획이었지만 그다지 바쁠 것도 없어 청량리행 전철에 올랐다. 졸다 깨다 하며 역들을 지나치는 동안 온다 리쿠의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다 읽었다. 마음에 남는 구절은 누군가의 시라는 '쓰기 시작하면 안 써지는데, 쓰기 전에는 써지려고 한다'. 생각날 때마다 찾아 읽고 싶은 작가에 온다 리쿠가 추가될 것이라는, 거의 확실한 예감이 들었다. 그럭저럭, 해는 지고, 다시 늘 있던 곳으로 돌아와 있자니 내가 천안에 다녀왔다는 사실이 마치 일어나지 않은 사건처럼 여겨졌다. 흰 종이에 투명한 귤즙으로 쓴 글씨처럼 쓴 것도 같고 쓰지 않은 것도 같은 모호함. 어쩌면 그 모호함을 두고두고 느끼기 위해 도둑처럼 천안에 다녀왔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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